1983년 2월 9일 아일랜드와 영국의 주요 언론들은 긴급속보로 어느 납치 사건을 보도합니다. 전날 저녁, 얼굴에 복면을 쓰고 총기를 든 6명 가량의 무장괴한이 아일랜드 킬데어(Kildare) 지방의 한 목장에 잠입해 ‘누군가’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납치범들은 2백만 파운드의 몸값을 요구했고, 양국의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팀을 꾸려 사건해결에 나섰지만, 결국 범인도 못 잡고 인질의 행방도 알 수 없는 미제(未濟)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 사건은 여전히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는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납치된 인질(?)이 바로 다름 아닌 씨수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씨수말 납치 사건의 인질 '셔가'
희대의 씨수말 납치사건 당사자는 ‘셔가(Shergar)'라는 5살짜리 씨수말로, 현역 시절 경마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당대 최고의 경주마로 인정받았습니다. 총 8번의 경주에 출전해 6승을 기록했는데, 우승 기록 중에는 영국의 엡섬 더비(Epsom Derby)와 킹 조지 4세와 퀸 엘리자베스 다이아몬드 스테이크스(King George VI & Queen Elizabeth Diamond Stakes), 아일랜드 더비(Irish Derby) 등이 있습니다. 특히 엡섬 더비에서는 2위로 들어온 말과 무려 10마신의 차이로 우승했는데요, 이는 226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근대 경마의 원조로 추앙받는 엡섬 더비 사상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옵저버(The Observer)’ 신문은 ‘셔가’의 신기록 갱신 우승을 20세기 100대 스포츠 명장면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1981년 유럽대표마로 선정된 ‘셔가’가 아일랜드의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요.
혜성같이 등장해 유럽 경마계를 충격으로 빠뜨린 ‘셔가’는 별다른 부상이 없었음에도 현역에서 은퇴, 씨수말로서는 다소 이른 나이인 4세부터 제 2의 삶을 시작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밸리매니(Ballymany)’ 목장에서 씨수말로 활동하게 된 ‘셔가’는 소유권이 마주인 ‘아가 칸(Aga Khan) 4세’를 포함해 40개의 신디케이트에게 넘어갔는데, 지분 1개당 25만 파운드, 1회 교배료는 최대 8만 파운드로 책정되며, 또 하나의 신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1981년 엡섬 더비에서 우승하는 '셔가'
씨수말 데뷔 후, 순조로운 은퇴생활(?)을 즐기던 ‘셔가’에게 납치의 손길이 뻗친 것은 1983년 2월 8일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화요일 밤이었습니다. ‘밸리매니’ 목장의 수석 관리사이던 ‘제임스 피츠제럴드(James Fitzgerald)’의 숙소에 자동차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6명 정도로 추정되는 복면 무장괴한이 난입해 옵니다. ‘제임스’의 가족을 총으로 위협해 부엌에 가둔 무장괴한들은 ‘제임스’를 앞세워 마구간에 들어간 뒤, ‘셔가’를 꺼내 자신들의 마필수송차량에 싣고 도주합니다. ‘제임스’는 눈을 가린 채 목장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내려놓고선 말입니다.
밤 사이 납치 사건을 신고 받은 경찰은 신속하게 수사에 나섰습니다만, 증거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용의자들이 워낙 주도면밀하고 신속하게 납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은 아일랜드 최대의 경주마 경매가 열리는 날이어서 마필수송차량이 전국 곳곳에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건을 담당한 수사팀장이 엉뚱하게도 심령술사와 점쟁이, 자칭 천리안 보유자 등을 수사팀에 끌어 들이면서 상황은 난관에 빠지게 됩니다. 아일랜드 전국의 마구간이란 마구간은 샅샅이 뒤졌어도 실마리를 찾지 못한데다가 허위제보까지 쇄도하던 중, 갑자기 협상인을 통해 납치범의 요구가 접수됩니다. ‘셔가’는 살아있으며, 그 증거로 사진을 남길 테니 몸값 2백만 파운드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런던 시경의 공안부가 사건에 개입하면서 협상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셔가’의 신디케이트들과 보험회사가 ‘셔가’의 몸값과 보험금을 지불할 수 없다고 공식발표를 하자, 납치범들은 사건 발생 4일 후에 마지막 연락을 한 뒤로는 모든 소식이 끊기게 됩니다.
'셔가'를 다룬 책과 영화
범인의 흔적도, ‘셔가’의 유해도 발굴되지 않아 영구 미제가 되어 버린 이 사건은 2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영국의 ‘더 타임즈(The Times)’ 신문은 올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10대 강탈사건’ 중 하나로 세계적 명화인 ‘뭉크(Munch)’의 ‘절규’ 도난사건을 비롯해 ‘셔가’ 납치사건을 소개했을 정도입니다. 워낙 충격이 컸던 탓인지 ‘셔가’ 납치사건은 영화로, 다큐멘터리로, 책으로 계속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만우절에는 언론의 단골손님으로 ‘셔가’의 유골이 발견됐다느니, 아직도 ‘셔가’가 살아있다느니 등등의 거짓말이 심심찮게 올라오고요.
영구 미제 사건의 특성상 ‘셔가’ 납치사건에도 다양한 음모론이 등장합니다. 가장 널리 퍼진 음모론은 바로 IRA(아일랜드공화국군)가 무기 구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저질렀다는 것인데요, 전직 IRA 요원이라는 사람이 폭로해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내용인즉슨, IRA의 특수부대에서 ‘셔가’를 납치하긴 했는데, 거칠게 날뛰는 '셔가‘를 잘못 다루는 바람에 다리에 상처를 입혔고, 몸값을 못 받을 것이라 판단한 납치범들이 총으로 사살해서 인근에 묻어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셔가’의 신디케이트는 IRA가 범인이라며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IRA는 자신들이 납치를 주도했는지 안했는지 공식 입장조차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리비아의 국가원수인 ‘가다피(Gaddafi)’가 아랍세계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일부러 아랍 왕족의 후예인 ‘아가 칸 4세’가 소유한 ‘셔가’를 납치했다는 설, ‘아가 칸 4세’에게 개인적 원한을 가진 자가 저질렀다는 설, 미국 뉴올리언스의 마피아가 ‘아가 칸 4세’와 마필거래가 무산되자 복수를 위해 그랬다는 설, ‘셔가’의 정자를 추출해 비밀리에 복제하기 위한 비밀집단이 범인이라는 설, 수백억대의 씨수말에 대한 감시체계가 너무 허술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가 칸 4세’의 자작극이라는 설 등등, 정말 다양한 추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엡섬 더비’에서 ‘셔가’에 19세의 나이로 기승했던 ‘월터 스윈번(Walter Swinburn)’ 기수는 자신이 들은 음모론만 해도 백만 개는 넘을 거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엡섬 더비 우승 직후 마주인 '아가 칸 4세'와 기수 '일터 스윈번'
25년이 지나도 아무런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셔가’의 흔적은 여러 곳에 남아있습니다. 우선 영국의 ‘애스콧(Ascot)’ 경마장에서는 ‘셔가’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셔가컵(Shergar Cup)’ 경주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셔가컵’ 경주는 팀대항으로 진행되는데, 2006년까지는 견원지간인 영국과 아일랜드가 한 팀, 여타 국가들이 한 팀을 이뤘습니다. 또한 아일랜드의 유명 맥주 브랜드인 ‘스미스윅스 맥주(Smithwick's Beer)’는 ‘셔가’를 소재로 한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고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명마와 이를 둘러싸고 꼬리에 꼬리를 물은 의혹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과연 이 희대의 납치사건의 범인은 누구며, ‘셔가’는 과연 아직도 살아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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