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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평가 & 수기/경마공원 소식

팻데이 강연문 (07/5/31) - My story

저는 콜로라도 시골마을에서 자라 6살 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말을 탔을 때는 아주 무서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말에 태우자 마자 저는 말 배를 발로 차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말을 달리기 시작했고 저는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비명을 질러댈수록 말은 더 빨리 달렸습니다. 그 말은 집주변과 마구간을 지나 다른 말들이 있는 풀밭으로 내달렸고 부모님은 바로 뒤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말을 세우자마자 저는 아버지의 품에 와락안겨 눈이 빠지도록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잠시 동안 달래준 다음 다시 말에 태워 집까지 되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말씀드리지만 제가 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말을 다시 타는 것이야 말로 가장하기 하기 싫은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말을 타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때 그냥 포기해 버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말을 사랑하고 기승하는 기쁨을 전혀 영영 누리지 못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아버지께선 말타는 법과 말에 대해 가르쳐 주셨지만 절대 안장을 사용하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안장에 앉는 법이 아닌 진짜 말 타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셨고 그 점이 나중에 저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9살 부터 리틀 브리치즈 로데오 말타기 대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저는 그리 실력이 좋지는 못했지만 즐겁고 신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주로내 공원에서 개최되는 로데오대회에도 참석한 적 있지만 그 당시 경마는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고등학생때는 프로 황소로데오 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실력이 있지 않았고 거의 매주 부상만 입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보고 기수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체구가 작고 승부근성이 있어서인지, 황소타기 실력이 별로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로데오 시즌이 끝날 무렵 저는 일거리가 떨어졌고 결국 지인을 통해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더러브렛 목장에서 일자리를 잡게되었습니다.



1973년 1월에 목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제가 처음 그 목장에 간 날 목장주와 관리자는 기수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경마장에 간 것은 주로내 공원에서 로데오경기를 참석하러 갔을 때 뿐이었습니다. 저는 경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제가 되고자 하는 바도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기수가 되려면 2~3년간 목장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기수가 되는 것에 흥미를 잃었고 결국 한달 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경주마를 타는 것은 제 운명이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다 저는 결국 라스베가스에 있는 트레이닝 트랙에서 두당 2달러를 받고 조교전담 기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경마관련 사람들이 보기에도 저의 기승은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저는 기좌와 고삐연결에 대해 직관적으로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들은 저에게 매우 순응적이었으며 매우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 일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세네시간씩 조교를 하고 간간히 일요일 오후에 매치 레이스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지명도 있는 아리조나 프레스콧 경마장에서 7월 15일에 데뷔하였습니다. 그뒤 7월 29일 첫승을 했는데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목장을 떠난 뒤 5개월 반 만에 이룬 성과였습니다. 그 뒤 저의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닉스 터프파라다이스 경마장에서 73-74년 겨울시즌 리딩자키로 선발 되었고 그 뒤 시카고, 뉴 햄프셔, 뉴 올리온즈를 거쳐 1976년 뉴욕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유명한 마주와 조교사들의 말에 기승하여 주요경주를 우승하는 등 단박에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 우디 스테판 조교사의 말을 타고 어썰트 핸디캡 경주를 우승했고

- Elliott Burch 조교사와 Rokeby 목장의 폴 멜론 마주의 글로잉 트리뷰트에 기승하여 Sheepshead Bay 경주를 우승하였습니다.

이런 성과 덕분에 마사전속기수로 일할 기회를 얻었고 8월에는 그 마방 말 Ivory Wand 에 기승하여 Test stakes에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가을시즌을 위해 벨몬트로 되돌아 갔을 때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Elliott Burch 조교사가 아파 조교보가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었고 경주성적도 좋지 않아 결국 Rokeby Stable에서 일자리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Roger Laurin 조교사의 Great Contractor에 기승하는 기회를 얻게되었습니다. 그 말에 처음 기승했을때 앞에서 달리던 말이 마체이상으로 넘어져 심각한 인마전도가 발생하였습니다.


앞의 쓰러진 말을 피하지 못해 결국 저도 낙마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저와 말에게 부상은 없었습니다.



몇 주 후에 저는 그 말을 타고 Jockey Club Gold Cup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상금은 3억원(30만불)로 그당시 미국내 두 번째 큰 상금이었습니다. 그 장면은 TV를 통해 미국 전체로 방송되었습니다.


경주 후 시상대 인터뷰에서 저는“제가 우승했습니다, 제가 해냈습니다”라는 말로 우승소감을 밝혔습니다.



저는 말이나 조교사 마주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고 저 혼자 우승을 이뤄냈다고 생각하게끔 말했던 것입니다.



저의 이런 오만한 태도 때문에 결국 얼마안가 기승기회를 거의 잃게 되었습니다.


기승기회는 아주 드물게 띄엄띄엄 주워졌습니다.


다시 기승기회를 얻기 위해 저는 시카고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점점 초조해져 갔습니다. 이혼을 하고, 빚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전년도 세금도 전혀 못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Sportsman's Park에서 봄 시즌 까지 기승해서 급히 돈을 모아 콜로라도로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행운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저는 몇 년간 만나온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그로부터 1년 후 결혼하여 올해 곧 28주년이 됩니다.



그녀의 내조 덕분에 다시 경주에서 우승을 거두기 시작했고 저는 콜로라도로 가는 대신에  Arlington Park 로 향하였고 거기서 매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까지도 저는 자만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지만 저의 타고난 재능과 높은 승률 때문에 조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했습니다.


1982년에 Music Leader라는 말로 처음 켄터키 더비에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합니다. 출장할 때 관중들은 켄터키 옛집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는 그순간 감동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비록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1982년은 저에게 의미있는 한해였습니다. 연말에 저는 전국 리딩 자키상을 두고 Angel Cordero Jr. 와 경합하게 되었습니다.



12월 31일날 저는 루지애나 뉴올리온스에 있는 Fairgrounds 경마장에서 아홉경주에 기승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첫 번째 말은 인기마였고 우승이 유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발주기 문이 열리자 그 말은 힘겹게 출발했고 착지가 불량하여 저는 말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에 깔리지는 않았지만 말이 쎄게 부딪히는 바람에 호흡곤란이 왔습니다.


저는 쓰러져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올해를 마감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부상을 입지는 않았고 그날 2개 경주를 우승하였습니다.


Angel기수와 저는 그해 똑같이 395승을 기록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미국내 경주가 있는 경마장은 루지애나 Vinton에 있는 Delta Downs뿐이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전세내어 Vinton으로 갔습니다. 첫 번째 기승마는 Danas Woof Woof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타고 쉽게 우승을 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제가 받은 5개의 리딩자키상 중 첫 번째 상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1984년과 85년에 연속으로 리딩자키로 선정되었지만 84년은 몇가지 이유로 더 의미있는 해였습니다. 84년에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헐리우드 파크에서 브리더스 컵 챔피온쉽 경주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초에 Vincent Timphony 조교사와 Black Chip 마방 소속의 Wild Again 이라는 말을 여러 번 기승하였었습니다.



그 말을 타고 뉴 올리온즈 핸디캡 경주와 핫 스프링즈 핸디캡경주도 우승한바 있지만 여름 이후로는 기승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브리더스컵 출마등록 현황을 보다가 세계 최초로 300만불 상금경주였던 클래식 경주에 등록한 Wild Again만 기승기수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Timphony씨에게 연락을 취해서 경주기승을 타진해 보기위해 바로 검량위원에게 갔습니다.



마침 제가 검량위원실에 갔을 때 Bill Allen 마주와 Timphony 조교사가 저를 찾아 기승을 확정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클래식 경주 출주마들은 대단했습니다. Gate Dancer, Desert Wine, Precisionist, Slew of Glod가 출전 했습니다. 저는 조교사가 바보같이 출마등록비 36만불을 내고 어쩔 수 없이 출전하는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발주기 문을 출발했을 때 경주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한바퀴를 남겨두고 결승선 지점에 가까워지자 Slew of Gold에 앞서 속도조절마로 가던 Mugatea가 갑자기 Wild Again쪽으로 몸을 틀었습니다. 그때 제 말을 바로 잡기위해 살짝 제어했더니 Wild Again은 재갈을 물고 바깥쪽으로 끌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Mugatea를 잽싸게 앞질러 1마일도 채 남기지 않은 지점에서 선행을 잡게 됐습니다.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는데 너무 빨리 달리고 있었습니다. 결승선 전방 400미터 지점에 다가가자 Wild Again은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에 Angel Cordero Jr.가 기승한 Slew of Gold가 추격해 왔습니다.      

그 순간 그냥 포기할 것 같았던 Wild Again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처럼 열심히 뛰어준 말은 그전에도 후에도 타 본적이 없습니다. 


결승선 직선주로에서 Gate Dancer라는 말이 바깥쪽에서 합류하는 바람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습니다. Gate Dancer는 안쪽으로 사행하였고 Lafitt Pincay 기수는 똑바로 보낼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Wild Again은 안쪽에서 투지있게 몸싸움을 하였고 바깥쪽으로 사행하려했습니다. Slew of Gold는 그 가운데 끼여 양쪽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였을 때 우승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Wild Again는 최선을 다했고 그점이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돌아와 확정되기전 착순게시대를 보니 제 번호가 맨 위에 있었고 그 다음이 Gate Dancer 그리고 Slew of Gold 순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번호가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결승선 직선주로에서 진로방해를 두고 Angel 기수가 이의제기를 했고, 결국 심의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심의실에서 진술을 한뒤 재결위원의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심의는 11분간 계속되었습니다. 제인생에서 가장 긴 11분이었습니다. 심의결과 Gate Dancer를 2착에서 3착으로 착순변경 시키고 Wild Again이 1착으로 확정되어 세계에서 가장 상금이 높은 경주를 우승하게 되었습니다.      

   


브리더스컵 클래식 경주 우승과 리딩자키로 선정되었던 덕분에 저는 이클립스 상 우수 기수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86년 1987년 1991년에도 선정되어 총 4번의 수상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뒤 저는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1985년에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 경주인 프리크닉스 스테익스에서 Wayne Lukas 조교사의 말 Tanks Prospect에 기승하여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뒤에도 프리크닉스 스테익스에서 4번을 더 우승하였습니다. 1990년에 Summer Squall, 1994년에 Tabasco Cat, 1995년에 Timber Country, 1996년에 Louis Quartorze에 각각 기승했습니다.

벨몬트에서도 3번 우승을 한바 있습니다. 제가 기승한 말중에 단연 최고로 꼽는 Easy Goer를 타고 1989년에, Tabasco Cat을 타고 1994년에 그리고 Commendable을 타고 저의 마지막 트리플 크라운 경주였던 2000년에 각각 우승을 하였습니다.


1986년에 저는 연도대표마가 되기전에 브리더스 컵 디스태프 경주를 포함하여 그해 여러 경주를 우승하였던 Lady's Secret에 기승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제가 탔던 또다른 연도대표마는 브리더스 컵 쥬버나일경주를 우승하고 1987년에 최고의 시즌을 보냈던 Favorite Trick이었습니다. 2세마가 연도대표마로 선정된 것은 1973년 Secretariat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1987년은 Favorite Trick뿐만 아니라 제 딸 아이린이 태어나 더욱 특별한 해였습니다.  


제 딸은 제 인생에 있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다 주는 지 모릅니다.


1989년 9월 13일에 알링턴 파크에서 저는 9경주중 8개경주를 우승하는 북미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1991년은 Dance Smartly라는 훌륭한 암말을 타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처음 그말을 타고 우승한 것은 캐나다 토론토 우드바인 트랙에서 캐네디안 오크스였습니다.


그뒤 수말들 사이에서 당당히 캐네디안 트리플 크라운과 몰슨 밀리언 경주도 우승했습니다. 또, 처칠 다운스에서 브리더스 컵 디스태프경주 에서도 우승하여 연승으로 시즌을 장식�습니다.


저는 8,803승과 수득상금 2,980억원(298백만달러)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주는 1992년 Lil E Tee를 타고 우승했던 캔터키 더비였습니다.



그날 발주기 문을 순조롭게 출발했고 잘 달리고 있었는데 첫번째 코너에서 앞서가던 말이 갑자기 진로를 바깥쪽으로 바꿔 제 앞으로 왔습니다. 저는 공간이 없어 말을 잠시 제어했고 살짝 추진력이 떨어졌습니다.


결승선 건너편 직선주로에 들어서면서 Lil E Tee 는 다시 발걸음을 되찾았고 결승선 전방 800m지점에서 Arazi가 추월해 지나갈 때 까지 잘 뛰어 주었습니다.Patrick Valenzuela기수가 기승한 Arazi는 여전히 힘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2등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편안아게 Arazi를 뒤따라가기로 했습니다. 5마신 정도 차이가 났지만 더 처지지는 않았습니다.



4코너를 돌면서 우리가 간격을 좁혀가기 시작하자 Patrick 기수는 좀더 속력을 내기위해 말을 열심히 몰았지만 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때 바로 제가 우승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Arazi는 이미 따라잡은거나 마찬가지였고 더 앞쪽을 주시하였습니다. Casual Lies를 선두로 총 3마리가 앞서 있었습니다.


저는 Lil E Tee에게 전력질주 할 것을 주문했고 말은 이에 투지있게 응해주어 결승선 전방 200m 지점에 다다르자 우승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분출을 느꼈습니다. 말을 타면서 느낀 다른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2005년 오른쪽 엉덩이 연골부상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회복도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그전처럼 기승할 수 있을지, 세계 최고의 기수들과 경쟁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해 6월 17일 Wally Dollase 조교사를 위해 Two Trail Sue라는 암말에 기승하게 되었습니다.

그전 에 그 말을 타본 적도 없고 아는 바도 없이 기승하게 되었습니다. 출발은 순조로왔지만 습성을 파악하기도 전에 말은 마구 달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천부적인 재능과 32년간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말을 진정시켰지만 말이 뛸 기력이 남아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승선에서 투지있게 달려주었고 결국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의기양양 해질거라 생각했습니다.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느끼는 승리의 기쁨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자랑스러움이나 기쁨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로인해 저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런 우승에 기뻐할 수 없는 것을 보면 은퇴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입니다.


고민끝에 이제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할 때가 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은 저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경주우승이 아닌 삶과 배려, 어려움을 공유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입니다.



1973년 7월 15일부터 2005년 7월 17일까지 제가 이룬 경이로운 기승기록 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저에게 더욱 보람과 가치 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