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 이세야 유스케가 나온다는 것. 그를 기억하는 첫 번째 영화는 <캐산>이었다. 모두가 재미없다 했지만, 이세아 유스케의 매끈한 몸과 사슴 같은 눈이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에 대한 추억을 곱씹게 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잘 생긴 마스크는 아니지만, 뭔가 느낌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런 그가 예쁜 포스터 안에서 차분한 피사체로 유혹을 하니, <눈에게 바라는 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실망. 대중탕 안에서 슬쩍 스치듯 지나가는 그의 나신. 아무래도 뒤 태가 <캐산>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몸이 심하게 ‘깡’ 말라서 늘어져버린 엉덩이는 남성이 가진 가장 섹시한 인체 부위가 엉덩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했다. 분명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서는 깊이가 느껴지고 더 다듬어지고 있었는데, 세월은 분명 그의 아름다운 육체를 좀 먹었을 것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이 못내 속상했다. 거울 속에 내 모습도, 나는 느낄 수 없지만, 분명 뭔가 계속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둘. <눈에게 바라는 것>을 보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았다. 슬픈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닦아냈다. 이유는 영화의 이미지가 <유레루>와 겹쳐졌기 때문이다. 오다기리 조 주연의 <유레루>는 형제간의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일본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오다기리 조의 인기 때문에 상당한 관심을 얻었다. 하지만 나는 <유레루>를 보며 분노했다. ‘언제나 빼앗기만 하는 사람이 있고, 언제나 빼앗기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영화의 기조 때문이었다. 형은 빼앗겼고, 동생은 빼앗았다. 늘, 형은 그렇게 웃고 있다. 형보다 잘 나가는 동생. 외모도, 머리도, 사회생활도. 모두 형보다 훌륭하다. 그런 동생은 형을 살인자로까지 만들어 버렸다. <눈에게 바라는 것>에서 이세야 유스케는 어머니의 돈을 빼앗고, 가족을 버리고 도쿄로 도망갔다 13년 만에 돌아온다. 무책임한 녀석. 그런 동생을 형은 옛날과 똑같이 감싸 안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고향을 지키고 있는 형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나타난 그가 너무 미웠기에 눈물이 났다. 그 뻔뻔함에 화가 났던 것이다. 무엇보다 <유레루>의 오다기리 조와 <눈에게 바라는 것>의 이세야 유스케는 둘 다 곱디고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예쁘면 용서되는 것이란 말인가. 이젠, 생각마저 왜곡된다. 셋. <눈에게 바라는 것>은 정말 별 내용이 없는, 지극히 일본적인 영화다. 기승전결을 따지기보다는 차분히 이미지를 따라가야 하는, 다소 지루해 보일 수도 있는 구조의 소극이다. 결말도 뻔히 보이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전개를 펼친다. 며칠 전 <더 퀸>을 보고 느꼈던 ‘이런 소재를 가지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다이아나 전 왕세자비가 죽고 난 뒤 일주일의 상황을 그린 <더 퀸> 역시도 정치적으로 중도를 지키고 있다. 영리한 감독의 재능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눈에게 바라는 것>도 <더 퀸>도 영화로 만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갑자기, 우리나라는 왜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차이. 환경의 차이. 그 여러 차이들이 조금은 부럽다. 넷. 세상을 편히 살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인간관계다. 특히나 대한민국의 오지랖 넓은 국민성은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를 양산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보다는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 안도하려고 하고,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눈에게 바라는 것>에서 가장 행복한 이는 이세야 유스케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나오는 캐릭터다. 약간 모자라 보이지만, 초등학교 교가를 흥얼거리며 늘 웃으며 세상을 대한다. 금전욕도 없어 보이고, 나중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고민이 없다. 그냥 현재에 충실하며 늘 즐겁게 순간순간을 보낸다. 그런 성품이 관객들의 웃음을 유도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 부러웠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아버지 친구의 아들들은 늘 나의 비교대상이요 스스로를 주눅들게 만드는, 피하고 싶은 현실이다. 최근 들어 가장 마음에 드는 CF카피는 ‘나는 나를 사랑한다’라는 모 이동전화 회사의 광고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렵다는 현실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과연,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다섯.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나는 ‘어머니’를 말하고 싶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준, 지금껏 건강하게 나를 키워주신 분.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분. 어머니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이다. 우리 어머니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성은 모두 위대하다. 생살을 찢어가며 세상을 보여주신 그 엄청난 사랑이야말로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눈에게 바라는 것>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아들의 결혼식 당일, 집안의 격이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그녀는 ‘이미,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사업을 한다고 13년이나 아들은 어머니를 떠나 있었다. 그것도 어머니가 어렵게 모아둔 종자돈을 들고서. 그런 아들을, 어머니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는 지금에도 ‘우리 아들이 올 때가 되었다’고 기다린다. 명문대를 나오고, 도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란, 정말 그런 존재다.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어머니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제가 효도할 수 있을 때까지, 어머니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금방 흐트러질 다짐을 다시금 맹세한다. 효자가 되기보다는, 주신 것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리고 싶은 욕심이다. 마지막. 영화는 어떠한 결론도 보여주지 않는다. 가족은 화해도, 관계의 변화도, 사랑도, 이별도, 상처도, 치유도, 어떤 것도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낯설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설원의 풍광이 주는 이국적인 아름다움만큼이나 생경하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이것이 일본 영화가 지닌 감수성이라는 것을. 내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라는 것을. 일본 친구들을 통해 일본인들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인간관계와 더불어 그 감정의 매듭이 어떻게든 풀린다는 데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담백하게 살고 싶다. 비록 재미는 덜할 수 있겠지만, 보다 담담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만큼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릴 줄 아는 대범함도 필요하다. 이제, 즐거움을 쫓아가기 보다는 안정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나 보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난다. 내 엉덩이도 이세야 유스케의 그것만큼 늘어져 버렸을까?
출처 ː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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